누구나 자신의 목적지에 다다르기 위해서는 길을 나서야 한다. 그 길은 때론 곧고 평탄하여 휘파람이 절로 나기도 하지만 떄로는 가파르거나 험하기 그지 없어 숨조차 가누기 힘들수도 있다.
우리는 모두 각자의 길을 가는 여행자와 같다. 인생이라는 여정은 지도도 나침반도 없어 당장 어느길로 들어서도 그 길 끝에 무엇이 놓여있는지는 예측할 수 없을뿐이다. 인생이라는 길 위에서 우리는 운좋게 웃음과 기쁨을 줍기도 하지만 재수없게도 슬픔과 노여움의 가시밭길로 들어서기도 한다. 힘겨운 고갯길에서 삶의 회한으로 한숨쉬기도 하고 반가운 내리막길에서 힘겨웠던 지난날을 추억으로 점지하기도 한다.
한남자는 길을 떠돈다. 마치 십자가를 짊어진 것처럼 대장장이의 모루와 연장을 짊어지고 그는 장터가 서는 마을을 떠돈다. 물론 어느 이하나 사연없는 인생있겠냐마는 막걸리 한잔에 안주삼아 뱉어내는 친구에 대한 원한은 그의 골이 깊어보이는 그의 사연을 궁금하게 만든다.
2004년에 완성되었지만 이제서야 빛을 보는 이 작품 자체처럼 이 영화는 한 남자의 세월이 만들어낸 사연을 발자국을 따라가듯 조심스럽게 좇아간다. 필름으로 제작된 이 영화의 LP판같은 영상처럼 영화의 이야기 역시 한국의 근대 단편문학을 상기시킨다.
그의 장돌뱅이같은 삶과 그의 발자취를 따라 펼쳐지는 자연의 풍경, 그리고 신영(강기화 역)과의 우연한 만남은 마치 이효석의 '메밀꽃 필 무렵'을 연상시키고 한 남자의 오해가 빚어낸 개인적 비극의 여정은 김동인의 '배따라기'를 연상시킨다.
주름살처럼 깊어갈 것만 같던 태석(배창호 역)의 원한이 길을 따라 걷는 세월속으로 침전되어가는 여정을 그린 이 작품은 한국의 토속적인 냄새가 지긋이 묻어나는 구수한 길위에 화해와 용서를 늘어놓고 있다. 마치 지난 세월의 한을 눌러담듯 길을 떠나는 태석이 신영을 만나는 것은 우연같은 필연이다. 언젠가 풀어나가야 했을 원한으로 점철된 그의 삶은 스스로 육두문자에 담아 낸 증오의 겉모양새와 달리 안식을 찾는다. 오갈곳없이 자신의 가슴속에 짐짝처럼 엉겨붙은 원망의 과거를 털어내지 못한 채 떠도는 그의 앞에 나타난 신영은 그의 지난 삶의 회한을 수면위로 끌어올리지만 그녀는 그의 구겨진 삶을 구원한다.
눈길에 겁없이 하이힐과 짧은 치마로 나서는 신영에 대한 호통은 자신의 증오에 대한 방생이자 용서를 내미는 투박한 손짓이다. 자신의 깊은 우정만큼이나 지독한 배신감을 느끼게 한 친구 득수(권범택 역)의 영전을 마주하게 될 것을 알면서도 길을 앞장서는 태석의 발걸음은 지난 세월동안 내딛었던 원망의 시간을 되돌린다. 마치 그가 걸었던 회한의 삶을 가리듯 눈으로 덮힌 길은 그의 삶이 증오를 덮고 화해를 모색해야 한다는 이정표처럼 느껴진다.
2004년도에 제작되었지만 이제서야 국내에서 빛을보게 된 이작품은 극중 태석처럼이나 사연이 많아 보인다. 국산작품에 덧붙여진 영어자막은 이 영화가 기약없는 국내개봉을 뒤로 한채 해외영화제를 떠돌았음을 알 수 있게 한다. 마치 모루를 지고 장터를 떠돌며 직접 연장질하는 태석의 삶처럼 디지탈 방식이 아닌 필름제작을 택하며 전국각지에 발품을 팔며 촬영한 영화의 영상은 낡아보이는 중후함과 따스한 아날로그적 온기가 새어나온다. 마치 LP로 듣는 음악만큼이나 깔끔하진 않지만 과장되지 않은 자연빛 그대로의 아늑함이 펼쳐져 보인다. 감독 스스로가 자신의 삶을 투영하듯 열연한 태석의 모습은 어쩌면 배창호 스스로의 페르소나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나그네의 발길옆으로 펼쳐지는 토속적인 풍경은 시각적인 푸근함을 느끼게 한다. 왁자지껄하면서도 구수한 시골장터를 비롯해 사계절이 고루 배어든 산길과 시골마을길은 도시 속에서 발견하지 못하는 일탈적 시선이며 지향하고자 하는 도피처처럼 아늑하다. 자연위를 밟고 밟아 만들어낸 길은 마을각지를 연결하고 인간과 인간의 발걸음을 소통하게 한다. 아다지오의 선율처럼 느리고 은은한 로드무비의 푸근한 여유는 급하게 내딛는 도시의 정서에 지쳐가는 도시인의 향수를 부를것만 같다.
자신의 저승 노잣돈을 위해 한푼두푼 복대를 제법채우던 태석은 자신의 원망과도 같은 인생의 청산을 위해 주머니를 비운다. 그리고 자신의 오해로 스스로 짊어져야 했던 아내와의 해후도 먼 발치에서의 관찰로 접은 채 다시 길을 나선다. 증오가 재촉하던 발걸음을 버리고 화해뒤로 되찾은 자신의 역마살같은 인생의 본연적 발걸음을 내딛는다. 자신이 짊어졌던 원한의 앙금을 버린 화해뒤로 다시 찾은 집을 다시 떠나감은 자신의 오해로 인한 죄책감의 정화로의 여정이 아닐까.
먼 길을 돌아온 배창호 감독의 새 영화는 그의 이름을 서서히 명장의 반열에 올려도 좋을 것 같다는 느낌을 품게 한다. 더없이 한국적인 이 영화의 영상과 된장냄새가 가득 배어나오는 정서에서 우리의 것에 대한 추억을 환기할 수 있음은 오히려 스스로의 정서를 자각하지 못하고 세월뒤로 내던져버린 오늘날의 우리에게는 신선한 자극이 될 것만 같다. 마치 학창시절 접해본 한국근대문학을 읽는 것과 같은 문학적 색채감이 옅보이는 이야기와 아름다운 우리의 풍경에 도취되는 서정적 미감의 발견은 지극히 우리의 정서에 대한 아늑함으로 다가온다. 그 여지없는 정서적 공감대를 필자는 감추고 싶지 않다. 아니, 노골적으로 지지하고 싶다.
-written by kharismani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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