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 남서부 서머싯 주의 옛 도시 글래스톤베리는 아더왕의 안식처였고 아르마티아의 요셉이 예수의 성배를 그 고장으로 가지고 왔다는 전설이 전해진다. 그것은 그 고장 사람들에게는 성스러운 자부심이자 자신들의 고장에 대한 정결함의 긍지이다.
그러나 1970년 9월 19일, 글래스톤베리의 새로운 역사는 시작되었다. 서머싯의 젊은 농장주 마이클 이비스는 지미 헨드릭스의 사후 이튿날 자신의 150에이커에 달하는 농장을 개방하고 음악축제를 연다. 이것이 오늘날까지 30여년간 지속되어온 글래스톤 베리 축제의 시작이었다. 단지 과거 자신이 보았던 블루스 페스티발에서 착안해서 시작한 이 소박한 축제는 전세계의 음악팬들이 한번쯤은 가보고 싶은 소망이 되었다.
축제가 시작된 이후 성스러운 땅은 매년 그곳을 찾는 불결한 히피들의 발걸음으로 북적거렸다. 주최자인 이비스조차도 예상못한 축제의 지속과 규모의 확대는 예상외로 많은 것을 고민하게 만들었고 일회성에 지나지 않으리라는 단발계획을 장기적으로 끌고나갈 대비책을 마련하게 만든다.
이 영화는 글래스톤 베리 축제를 다큐형식으로 담았지만 단순히 그 축제 현장 자체에 대한 보고서따위는 아니다. 필름에는 30여년간 지속된 축제의 열기가 고스란히 담겨 있고 그 세월동안의 변화와 변화가 불가피했던 사연들이 고스란히 보여진다.
다큐 형식의 작품들은 진실성 여부에 주안점을 둔다. 그리고 이야기를 풀어가는 방식은 진실성에 접근하는 과정을 양파껍질 벗겨내듯 차근차근 풀어나가는 것이다. 이 작품은 글래스톤 베리 축제의 현장에 대한 진정성을 이야기하려 한다. 히피들의 자유와 낭만, 그리고 그들이 누리는 무질서의 향락으로 채워져 있던 글래스톤 베리 축제의 정신은 30여년간의 세월을 이어오며 무엇으로 남았는가. 그리고 그 혼란스러운 발걸음은 그 현장의 생생한 날것의 느낌 그 자체를 적극 활용함으로써 관객의 이목을 사로잡는다.
초창기 그곳을 찾는 수많은 인파의 대부분은 히피들이었다. 반전과 평화, 무정부주의적인 자유를 갈망하는 그들은 글래스톤 베리에 지독한 체취로 메워진 축제의 열기를 달군다.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알몸으로 군중속을 활보하는 그들에게 그곳은 어느 것 하나 소유하지 않아도 낙원같은 세상이다. 자신들이 갈망하는 자유가 도처에 널려있고 그 자유를 축복하듯 음악이 울려퍼진다. 그곳은 지상 유일의 자유가 살아 숨쉬는 현장 그 자체이며 그 자유를 만끽하고 자신들의 행위 자체로부터 뿜어져 나오는 열기를 그 넓은 들판에 가득 채운다.
이 영화는 엄연히 말하자면 기록영화다. 그렇다면 이 영화는 무엇을 기록하려 하는가. 글래스톤 베리의 역사와 그 글래스톤 배리를 거쳐간 스타들의 라인업 리스트? 혹은 글래스톤 베리의 규모와 그 축제의 수익 정도? 물론 이 역시 글래스톤 베리를 말하는데 간과해서는 안될 부분이다. 하지만 메가폰을 잡은 줄리안 템플의 생각은 조금 달랐나보다. 그가 주목한것은 글래스톤 베리의 골격보다는 심장처럼 펄떡이는 열기가 숨쉬는 현장 그 자체에 주목했다. 축제를 설명하기 보다는 축제속으로 직접 들어간다. 관객에게 글래스톤베리가 얼마나 거대한 축제인가를 장황하게 설명하기 보다는 관객을 그 축제의 한가운데로 인도한다.
글래스톤 베리에 대한 찬사나 미화 따윈 없다. 다만 그 축제를 즐기는 사람들과 축제가 변해가는 과정을 묵묵하면서도 생동감있게 잡아낸다. BBC방송의 공식방송기록과 영국영화협회로부터 제공받은 1920년대의 글래스톤베리 영상, 그리고 축제에 참가했던 이들로부터 건져 낸 셀프카메라, 깔끔한 편집과 조악한 생생함이 공존하는 이 영화는 그 30여년간의 연대기를 2시간여의 시간안에 담아내야 하는 긴밀한 작업이었음이 분명했다. 또한 많은 자료중 필요한 자료를 추리는 것도 쉬운 일은 아니었을테다. 어쨌든 영화는 그 방대한 자료들을 버무리고 템플 감독이 직접 이비스와 함께 축제현장을 오가며 나눈 인터뷰내용까지 곁들인채 다양한 시각에서 축제를 조명한다. 망가져가는 성지에 대한 우려때문에 축제에 불만을 노골적으로 드러내는 서머싯 고장의 엄격한 가톨릭 신자들의 모습조차도 그대로 카메라는 비춘다. 비가 내려 진흙밭으로 변한 농장바닥에서 진흙범벅이 되어도 축제의 열기안에서 행복에 마냥 젖은 관객의 모습은 이와 대칭점을 이룬다. 누구를 위한 축제인가에 대한 문제라기 보다는 축제를 즐기는 이와 축제를 거부하는 이들의 모습은 모두가 글래스톤 베리의 생생한 진실이다. 영화는 그런 모든 사실을 있는 그대로 담아낸다.
무엇보다도 백미는 중간중간 삽입되는 음악이다. 혹시나 글을 읽고 있는 그대가 한번쯤 글래스톤베리같은 외국의 유명한 음악 페스티발의 열기를 갈망했다면 2시간동안 런닝타임은 그대를 잠시나마 행복하게 만들지 모른다. 벨벳 언더그라운드의 음악을 포문으로 영화의 중간중간 삽입되는 주옥같은 음악들. 그것도 그 글래스톤베리에 울려퍼지던 음향으로! 닉 케이브. 더 브레이버리, 모리세이, 프로디지, 뉴오더, 사이프러스 힐, 뷰욕. 밥 말리, 핑크 플로이드, 케미컬 브라더스, 매시브 어택, 콜드 플레이, 펄프, 블러 등..35년의 세월동안 글래스톤베리를 빛나게 해준 라인업 모두를 담아내기에는 2시간은 짧고 해야할 말도 많다. 하지만 2시간동안 보여지는 영상과 음악은 축복이다. 그대가 꿈꾸던 막연한 글래스톤 베리에 2시간동안 초대받은 그 느낌은 어쩌면 그대가 영국땅에서 태어나지 못했음을 진심으로 한탄하게 만들지도 모른다. -적어도 필자는 그순간 진심으로 그랬다.-
모든 것에 제약이 없었던 축제현장은 담장이 둘러쳐지고 CCTV가 설치된다. 히피들은 출입이 금지되고 단 돈 1파운드로 출입이 가능했던 그 현장은 이제 125파운드를 요구한다. 그래도 여전히 사람들은 붐빈다. 표를 구하지 못해 담장을 넘기도 하고 히피가 사라진 그 현장의 과거를 추억하기도 하지만 그곳은 여전히 그들에게 사랑하고픈 곳이다. 깔끔하게 변질된 듯한 그 현장은 여전히 적은 출연료에도 불구하고 스타들이 마이크를 잡으며 자신의 무료한 삶을 3일이나마 해방시켜 줄 자유와 낭만이 존재한다. 그 담장과 CCTV는 제약일지라도 그 자유와 낭만을 지키기 위한 필요악이다. 그리고 그 축제를 앞으로도 계속 보존해나가기 위한 궁여지책이다. 무엇보다도 그곳에서 지겨운 일상으로부터의 일탈을 꿈꾸는 여피들을 위한 보호수단이다. 상업에 물들고 변질되었다는 손가락질을 감수해야하겠지만 글래스톤베리축제는 유지되고 그 현장의 열기는 보존해낼 수 있다. 그것이 우드스탁과 글래스톤베리의 차이가 아닐까.
좀 더 자유로워지기 위해서는 단단히 뿌리를 내려야 한다.
-벨라 레비츠스키-
우리는 누구나 자유를 꿈꾼다. 그래서 글래스톤 베리는 소중하다. 그곳에는 음악이 있고 음악을 위한 청중이 있다. 그들이 만나는 순간 그 시간은 세상의 권위와 질서의 억압으로부터 해방되는 무중력의 공간이 된다. 글래스톤베리는 3일동안의 자유를 위해 3일간의 불편함을 참아낼만한 가치가 있다는 것. 불결한 화장실의 악취도 신발에 혹은 옷에 덕지덕지 달라붙는 진흙더미도, 끈적거리는 여름 더위도 모두다 견뎌낼 수 있게 만드는 고결한 가치가 있다고 영화는 그 현장의 모습을 통해 관객을 설득시킨다. 그리고 그런 자유를 35년간 지속시켜나가는 과정을 최대한 주관적 견해를 배제한 채 그곳의 열기와 음악으로 관객을 선동한다. 비단 그대가 음악에 심취하지 않아도 좋다. 그곳의 열기에 취할 수 있다면 일상으로부터 억눌린 제약으로부터 잠시나마 달아나고 싶다면 글래스톤베리는 우리에게 하나의 이상향이 될 것이다. 그리고 그 곳의 열기가 식지 않고 언제까지나 달아오르길. 갈 수 없는 그곳이라 할지라도 글래스톤베리가 존재한다는 사실 자체만으로 우리는 마음속에 그리운 열정을 품을 수 있지 않을까.
-written by kharismani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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