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해전 배모 배우가 모 이동통신사 광고에서 '상식에 맞는 일을 하겠다'는 얘기를 널리 했었다. 물론 세상이 상식에 맞게 돌아가야 하는 건 당연하지만, 영화라는 매체는 또 너무 상식적으로만 가면 싱겁기도 하다. 이렇게 가면 그렇게 되겠거니 하는 상식을 깨뜨려주고 뒤통수를 맞는다는 것이 상당히 독특한 즐거움이 되는 분야가 영화고, 비단 영화 뿐 아니라 모든 예술 분야가 다 그러할 것이다.
이 영화 <다세포 소녀>가 그런 영화다. 일반적인 장르영화, 일반적인 이야기 흐름, 일반적인 현실성을 기대하고 이 영화를 보셨다간 '뭐 이런 영화가 다 있어?'하며 바깥으로 나온 뒤 눈에 가장 먼저 띄는 사물은 무엇이든 화풀이 상대가 될 가능성이 높다. 그런데 나는 다행히 그렇지 않았다. 내가 워낙에 어딘가 괴상한 듯한 영화를 꽤 반기는 취향이라서 그런가, 여지껏 본 적이 없었던 독특한(정신나갔다는 얘기까지 들을 수도 있을) 스타일을 지닌 이 영화가 상당히 반갑게 다가왔다.
이 영화는 특별히 큰 줄기를 이루는 이야기가 없다. 그렇다고 옴니버스 영화처럼 여러 인물들의 에피소드가 독립적으로 전개되는 것도 아니다. 그저 다양한 인물들을 둘러싼 다양한 이야기들이 산발적으로 펼쳐진다. 집이 찢어지게 가난해서 가난을 등에 업고 다니며 먹고 살기 위해 원조교제까지 감행하는 가난소녀(김옥빈), 으리으리한 집안을 배경으로 100여명 이상의 여자친구를 두고 있지만 정작 마음은 겉모습만 여자인 남학생 두눈박이(이은성)에게 빼앗겨 버린 킹카 안소니(박진우), 기괴한 외모때문에 남들 다 하는 동안에 자기만 못해본 왕따 외눈박이(이켠) 등 각자 나름의 사연을 지닌 친구들이 서로 부대끼며 순간순간 이야기를 만들어간다.
등장인물들이 워낙에 많고 비중들도 엇비슷한 터라 누구의 연기가 딱 두드러진다고 보기는 어렵지만 모두들 연기경력이 많지 않은 신인급 배우들임에도 안정적인 연기를 보여준다. 가난때문에 온갖 억울한 표정은 다 짓지만 '흔들녀'다운 자질이 남다른 가난소녀 역의 김옥빈, 자기 부유함이나 잘생긴 외모를 대놓고 자랑하진 않지만 외국출신이라고 자랑이라도 하듯 잦은 외국어 남발로 재수 뚝뚝 떨어지게 하는 안소니 역의 박진우, 머리에 가려진 한짝 밖에 없는 눈처럼 매사에 소심하고 부끄러운 외눈박이 역의 이켠, 공부 잘하는 모범생이지만 사실은 마조히즘과 음란채팅을 즐기는 회장(이용주) 등 다 나름의 뚜렷한 개성을 갖고 무난한 연기를 보여주었다. 중견배우들의 연기도 상당히 인상깊었다. 모든 반의 담임선생님 역할을 돌아가면서 기상천외한 분장효과로 보여준 이재용(감독과 동명이인) 씨의 연기와 역시나 기똥찬 분장과 시치미 뚝 뗀 청승 연기로 웃음을 자아낸 가난소녀 엄마 역의 임예진 씨도 인상적이었지만, 정말 압권이었던 건 덩치에 너무도 안맞는 복장을 하고서도 전혀 어색하지 않은 여성스러움을 보여준 왕칼 언니 역의 이원종 씨였다. 나름 뽀샤시한 셀카효과하며 매사에 여성스러움이 뚝뚝 묻어나는 행동 하나하나까지, 정말 연기에 있어서 외모란 아무런 장벽도 되지 못함을 다시 한번 절실히 느꼈다. 이 영화 속 최고의 감초 연기가 덩치에 안맞게 노시는 바로 이 왕칼 언니가 아닌가 싶다.
앞에서 말했듯 이 영화는 일반적인 상식으로 통하지 않는 부분이 상당히 있다. 물론 원작에서부터 영화는 상당히 기발하다못해 도발적인 설정을 가지고 출발했기도 하지만, 그게 막상 영화로 옮겨지니 한층 더 도발적인 스타일로 변한 듯 하다. 우선 시각적 스타일 부분. 영화는 나름 어느 정도 수긍이 가는 모양새를 하고 있는 종교 시범학교 무쓸모 고등학교를 배경으로 하고 있지만 그 속을 들여다 보면 매우 만화적인 구석으로 가득하다. 원색적이고 강렬한 색채로 가득한 교실 디자인도 그렇고, 종교별로 반을 나눠놓고는 그에 따라 교복까지 따로 디자인한 학교방침(?)이나, 각반의 모든 담임선생님들이 알고보면 한 얼굴을 하고 있는 모습도 특이하기 그지없다. 특이한 건 학교 안의 풍경 뿐 아니다. 수시로 들리는 만화적인 효과음, 뜬금없이 나오는 노래방 자막, 종종 등장하는 뮤지컬 퍼포먼스 등 영화는 드라마에서도 보게 된다면 굉장히 특이하게 보일 각종 효과들을 거침없이 사용하고 있었다. 이전까지는 세련되면서도 과잉하지 않은 절제의 미학을 보여줬던 <정사>, <스캔들>의 이재용 감독의 작품이라고는 믿기 어려울 만큼 어디로 갈지 모를 튀는 스타일을 지녔다고 해야 할까. 원작이 만화여서 그런지, 비록 실사영화로 옮긴다 하더라도 너무 현실적인 영화보다는 오히려 만화에 가까운 영화로 만들려 그런 효과를 냈는지 모르겠다. 그런 점에서 비현실적이지만 황당하고 재치있는 웃음을 자아내는 데에는 성공하지 않았나 싶다.
그러나 이런 외형적인 비상식적임은 빙산의 일각에 불과하다. 아실 만한 분들은 잘 아시다시피, 여기 나오는 캐릭터 하나하나가 '어쩜 저럴 수가' 하는 소리를 불러일으킬 만한 캐릭터들이다. 선생님은 다른 선생님이 '성병'에 걸려 결근했다고 너무도 당당하게 말하고, 그 소식에 반내 모든 학생들이 걱정 가득한 표정(선생님보다 자기가 걱정되는)을 보이는 모습도 참 당황스럽다. 그런가하면 학생이 원조교제 약속땜에 조퇴가 있다고 하니 선생님은 나무라긴커녕 '효녀야...'하면서 외려 대견하게 생각한다. 원조교제한답시고 만난 조폭 보스는 알고보니 이성의 복장을 선호하는 '크로스드레서'고, 이들은 성별을 뛰어넘은(?) 우정을 나누기도 한다. 뿐만 아니라 어딘가 변태적이면서도 화려하게 느껴지는 신종 종교의 등장과 학교의 괴상한 음모에 이르기까지, 영화는 학교를 배경으로 한 보통 영화들에서 쉽게 연상할 수 있는 모든 소재들을 철저히 배반해버린다. 이정도 가지고는 싱거워서 영화가 될 수 없다는 듯 말이다. 물론 15세 관람가인 등급 특성상 원조교제 장면이 엉뚱하게 순화되기도 하고, SM이나 동성애와 같은 소재도 노골적으로는 등장하지 않지만, 이걸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하하 웃으면서 주제로 삼는 학생들의 모습은 여전히 황당하다. 표정 하나 안바뀌고 '너 나하고 처음이라며?', '일대일은 처음이랬지'하는 식의 '어랍쇼?'를 유발함직한 이야기들을 쏟아내는 이런 학생들은 정말 대단하다 싶을 정도로 쾌락에 충실해 있다.
그런데 이 영화가 여기서 또 만들어내는 특이점은, 전체적인 캐릭터 설정이나 이야기 전개가 철저히 비현실적인 느낌으로 흘러가면서도 은근히 현실에 대한 풍자적 시선을 놓치지 않고 있다는 것이다. 하하호호 행복한 웃음으로 화목한 가정임을 자처하지만 사실 그 이면에는 음란한 욕망이 꿈틀거리고 있고, 권위적이고 우악스러운 이미지가 어울릴 조폭 보스가 사실은 여성에 대한 동경을 가지고 있고, 온갖 여고생들의 선망의 대상이 되는 킹카가 정말 마음을 주는 대상은 알고보니 남자다. 이렇게 여기 나오는 캐릭터들 중 대다수는 남들이 원하는 이미지와 자신의 마음이 가는 욕망 사이에서 갈등하면서 아이러니한 상황을 다수 발생시킨다. 우리가 왕칼 언니의 행동을 보고 웃음을 터뜨리는 것부터가 그분의 외모에서 연상됨직한 원래 이미지들을 거침없이 배반하기 때문이 아닌가. 이처럼 영화는 외부환경이 원하고 요구하는 이미지로 인해 자신의 솔직한 욕망을 어디까지나 마음 속에 가둬두는 현대인의 이중성을 유쾌하게 풍자하고 있기도 하다.
이뿐이 아니다. 입양되어 부유한 환경에서 떵떵거리며 자란 뒤 사랑의 딜레마 앞에서 좌절하자 '물질의 힘'을 빌리자며 자신을 다독이는 안소니의 모습, 시계가 1천만원대인 걸 알고는 득달같이 달려드는 이들의 모습에서는 돈이고 물질이면 뭐든지 OK하는 현대사회의 물질만능주의를 은근슬쩍 비꼬고 있기도 하다. 요상한 종교 단체에서 춘 춤이 인터넷을 통해 동영상으로 퍼지고, 이것이 결국 소녀를 쥐락펴락하는 모습은 자극적인 것에 쉽게 달려들었다가 쉽게 빠져나가는 현대인의 이른바 '냄비 근성'을 풍자하고 있기도 하다. 그만큼 영화는 대책없는 스타일 속에 나름 생각있는 풍자의 면모까지 살며시 갖추고 있는 것이다.
그저 내키는대로 느낌이 오는대로 행동하려는 무쓸모고 학생들과, 그런 욕망은 원래 없는 척 남들에게 멀쩡한 듯한 태도로 일관하는 어른들의 모습 중에서 어떤 것이 진정 '다세포'적인 삶의 자세일까. 원조교제와 같은 껄쩍지근한 요소들로 인해 그 당사자인 아이들은 온갖 안좋은 소리를 듣지만, 사실은 이런 일들도 겉으로는 최대한 욕망을 억누른 채 뒤에서 은근슬쩍 그 욕망을 배출하려 하는 어른들의 태도에서 비롯된 것이 아닌가 싶기도 하다. 영화는 이렇게 사춘기 샘솟는 욕망 앞에서 자유롭고 싶은 아이들과 자신들 역시 한때는 이런 욕망을 가졌었고 혹은 지금도 가지고 있으면서도 아이들을 모범적인 틀 앞에서 통제시키려는 어른들의 모습을 통해서 '조신한 척, 모범적인 척 하며 다니는 것도 어떻게 보면 자신의 본질에 대한, 자신의 욕망에 대한 배신이 아닌가' 하는 발칙한 메시지를 던지고 있다. 현실은 아랑곳하지 않고 욕망 앞에 자유로워지라는 이 영화의 외침이 어쩌면 대단히 무책임하고 대책없이 들릴지는 몰라도, 일리가 없는 건 아닐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영화는 사회가 요구하는 빡빡한 기준이 아무리 나의 본모습을 죽이려 들어도, 절대 기죽지 말 것을 당부한다. 가난 앞에 주눅드는 가난소녀나, 남자를 좋아하게 됐다는 현실 앞에 좌절하는 안소니나, 태어날 때부터 눈이 하나밖에 없는 외눈박이나, 왜 그들이 좌절하고 주눅들어야 하는가 하고 영화는 반문한다. 사회가 이게 기준이라며 만든 침대 앞에 자신의 몸을 맞추기 위해 발을 자르기 보다는, 그런 사회가 서서히 침대 사이즈를 늘릴 때까지 끝까지 자신의 본질에 대해 부끄러워 하지 않는 태도가 중요함을 도발적인 상상력과 비주얼 만큼이나 도발적으로 말하고 있는 것이다. 얌전한 척, 조신한 척하지 말고 자신의 본래 모습을 자유롭게 펼치라는 이 영화의 목소리는 위험하게 들리지만서도 꽤 매력적인 게 사실이다.
이 영화의 현재 평점이 <미션 임파서블> 1편에서 작전 수행하다 수직 낙하 위기에 처한 톰 크루즈마냥 바닥과 마주하고 있는지라 이 정도 호평을 하기에는 상당히 조심스러운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어쩌랴. 유독 독특한 방식일 수록 쌍수들고 환영하는 나의 입장에서는 이 영화가 이런 점들로 인해 꽤 매력적으로 다가온 것을. 어차피 이 영화는 감독의 전작처럼 세련되고 고급스러운 스타일을 목적으로 만든 영화도 아니거니와, 대다수 대중들에게 호소력 있게 다가갈 만한 목적으로 만들어진 영화가 아니다. 원작부터가 대담하다못해 위험한 상상력으로 유명세를 얻었으니만큼, 영화 역시 그런 유별나고 발칙한 상상력과 메시지로 호불호가 분명히 갈릴 만한 유별난 영화가 되는 것이 목적이었을 것이다. 그런 점에서 난 이 영화가 대다수에게 만족감을 줄만한 이미지에서 벗어나 용감하게 유별남을 과시했고, 그게 내겐 독특한 매력으로 다가왔다는 점에서 높은 점수를 주고 싶다. '넘치는 헛된 욕망'도 때론 마냥 바이바이하지는 말라는 그런 용감한 메시지 말이다.
한마디 더 : 엔딩크레딧이 올라갈 때면 이 많은 등장인물들의 미래상을 확인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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