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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마을에 부는 바람은 칼날보다 매서웠다 취한 말들을 위한 시간
vinappa 2005-05-08 오전 1:00:55 1501   [4]
    그 마을의 풍경을 한마디로 축약하자면 그것은 다름아닌 모순이었다. 지리학에 정통하지도 역사에 일가견을 가지지도 않은 산지기에게 이 영화의 배경인 바네의 풍경은 모순이라는 말 외에 어떤 단어로도 설명이 되지 않았다. 폭설이 쏟아지는 열사의 나라. 영화를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배경이 되는 시대와 지역에 대한 이해가 따라야 한다는 것이 산지기의 지론인데 그 주장이 부메랑처럼 내게로 다시 돌아 올 줄 꿈엔들 생각했겠는가. 무지함보다 더 무서운 것은 선입견이다. 선입견은 대상의 장점을 제대로 파악 못하게 할뿐더러, 알만큼 안다는 오만을 부추겨서 지레 먼길로 지나쳐 가게도 한다. 이 영화를 이제서야 보게 된 것은 전적으로 압바스 키아로스타미와 모흐센 마흐말바프로 정리되었던 이란 영화에 대한 선입견 때문이다. 이들의 영화가 산지기 개인에게 좋지 못한 기억을 남겨서가 아니라 이 두 거장에게 너무 주목한 나머지 이 영화를 아류 내지는 유사작으로 짐작케 했고, 굳이 봐야할까라는 귀차니즘을 발동시켰기 때문이다. 뒤늦게 본 만큼 후회도 컸고 충격도 컸던 이 영화는 압바스 키아로스타미라는 거대한 자장 안에 있으면서도 키아로스타미를 부정하는 영화다. 이 영화의 곳곳에는 키아로스타미를 향한 항의가 도사리고 있고, 그 항의는 곧바로 세계를 향한 현장 르포로 이어져 있다.

    바흐만 고바디는 인터뷰에서 밝히기를 자신은 키아로스타미로부터 어떤 영향도 받은 바가 없다고 말했지만 이란의 젊은 영화 작가들 중 키아로스타미의 영향권으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운 자생적 작가는 거의 없다. 키아로스타미의 자장을 힘들게 벗어 나면 모흐센 마흐말바프라는 또 다른 에너지 장을 만나게 된다. 단지 해석의 관점과 접근 방식이 다를 뿐이지 이란 사회의 영화 작가들은 동일한 시대를 고민하고 있고 키아로스타미와 마흐말바프의 영향력은 이란 영화계 전체를 양분할 만큼 폭넓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바흐만 고바디의 영화도 이란 영화계의 한 축인 키아로스타미의 영향권 내에 위치한 영화다. 고바디의 영화 속에서 키아로스타미의 영향력은 그에 대한 반감이나 맞섬으로 드러 난다. 이 영화 <취한 말들을 위한 시간>은 키아로스타미가 우화작가와 시인의 이름으로 사색하고 낙관한 공간을 르포라이터가 찾아와 '이게 현실이에요. 영감님'이라며 강변하는 톤의 영화다. 동일한 공간은 아니지만 같은 민족, 유사한 생활 환경을 배경으로 하면서도 접근하는 자세에 따라서 영화는 이처럼 달라질 수도 있는 것이다. 이런 가정을 해 보면 어떨까? 방송 PD 파자드가 이란 오지의 숨겨진 보물같은 시아 다레 마을에서 한 노파의 죽음을 기다리며 특종을 꿈꾸고 있을 때 - <바람이 우리를 데려다 주리라> - , 그 이웃 쯤 되는 바네 마을에서는 퇴행성 질환을 앓고 있는 마디가 주사와 약에 생명을 의탁하며 살고 있었고, 그의 형제들은 국경 너머로 밀매행을 떠난 아버지 때문에 매순간 노심초사하며 날품을 팔며 살고 있었다고.

    아윱의 2남 3녀 형제들과 아버지가 살고 있는 바네 마을은 이라크 국경에 위치한 가난한 쿠르드 족의 마을이다. 봄부터 가을까지는 평범한 이란 북부의 풍경과 유사하지만 겨울이면 폭설로 뒤덮이는 불모지나 다름없는 곳에서 그들 일가는 하루하루 힘겹게 살아가고 있고 나이로는 둘째인 가련한 마디는 퇴행성 질환으로 하루하루 죽어가고 있다. 10년 넘게 이어진 전쟁의 후유증으로 삶의 터전이 파괴된 이 마을의 주민들은 폭설이 내려 길이 끊어지기를 기다린다. 그 몇 개월 간 허술해진 경비망을 뚫고 국경을 넘어 밀매를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아버지의 밀매행이 주된 수입원이지만 아이들도 돈을 벌어야 한다. 가사를 돌봐야 하는 로진과 몸이 불편한 마디, 아직 세살도 채 되지 않은 막내를 제외하고 남은 아윱과 아마네는 마을과 제법 떨어진 도시의 시장에 나가 소포로 보낼 물건을 포장하기도 하고, 무거운 짐을 져 나르는 하역인부 일을 하기도 하면서 몇 푼의 돈을 번다. 아윱과 아마네는 바쁘게 일을 하고, 일감을 구걸하는 와중에 마디까지 보살펴야 한다. 마디는 나이로는 아윱과 아마네의 형이자 오빠지만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그들의 동생이나 다름없다. 마디가 앓고 있는 퇴행성 질환은 수술로도 완치가 불가능한 불치의 병으로 마디 자신에게는 천형이고, 그들 가족에게는 재앙과 같다.

    어느날 아버지가 지뢰를 밟아 사망하면서 아윱은 가장의 역할을 떠맡게 된다. 열 두살의 아이가 다섯 식구의 가장노릇을 한다는 것도 버거운 마당에 아윱은 마디의 수술비까지 마련해야 한다. 아윱의 변변찮은 수입이 대부분 생활비로 소요되고 마디의 수술이 급박해지자 맏이인 로진은 지참금 대신 마디의 수술을 조건으로 이라크인의 후처로 시집을 가게 된다. 그런데, 애초의 약속과는 달리 마디를 책임지지 못하겠다는 시어머니의 트집으로 노새 한마리를 지참금으로 받고 로진은 이라크인의 첩이 된다. 지참금으로 받은 노새를 팔아서 마디의 수술비를 마련하기로 결심한 아윱은 노새를 끌고 밀매꾼들과 함께 국경을 넘으려 하지만 갑자기 들이 닥친 도적떼 때문에 어른들은 모두 도망치고 술취한 노새와의 실갱이 끝에 극적으로 국경을 넘는다. 국경을 넘는 아윱의 등에는 마디가 업혀 있다.

    성인이 아닌 아이의 시선이 이야기 구조의 주요 시점이라는 점에서 이 영화는 키아로스타미의 <내 친구의 집은 어디인가>와 닮아 있다. 키아로스타미는 <내 친구의 집은 어디인가>에서 아이의 시선에 잡힌 어른들의 모습을 통해 현대 이란 사회가 겪고 있는 저개발의 원인과 모순의 실체를 꼬집었다. 아마드는 푸쉬케와 코케를 잇는 구불구불한 산길과 코케 마을의 미로같은 골목들을 관찰하고 탐험하면서 동행하는 감독으로 하여금 이란 사회의 현실을 읽어 내게 했고, 거장의 원숙한 카메라는 성찰의 미덕과 현자의 낙관까지 더해 아름다운 한편의 영화를 탄생시켰다. <취한 말들을 위한 시간>의 화자인 아마네는 아마드와 네마자데와 동급생 정도의 나이이고, 그들처럼 소속 집단의 보편적인 아이들을 대표하는 미성숙한 인격체다. <내 친구의 집은 어디인가>가 그랬던 것처럼 이 영화도 연출자의 개입이 최대한 절제된 영화다. 감독 본인의 것으로 여겨지는 누군가의 질문에 답하던 아마네가 대화를 중단하는 순간 감독은 현장 답사를 나온 시찰단처럼 그들의 일상과 바네 마을을 무표정하게 관찰한다.

    이 영화의 안내자 격인 아마네는 쿠르드 민족의 부조리한 현실을 논리적으로 설명할 만한 성숙한 인격체가 아니다. 불치병을 앓고 있는 오빠의 수술비보다 새 노트가 우선인 철없는 아이일 뿐이다. 감독이 자기 민족의 비참한 현실을 그린 영화의 화자로 10세 미만의 유아를 선택한 것은 일종의 양날의 검이 아닐까 싶다. 성인의 논리적 고발로 비참함을 극대화하는 대신 철없는 아이의 시각임을 전제 조건으로 하여 관객을 타자화시키겠다는 하나의 날과 아이의 시선으로 바라 본 쿠르드 족의 현실이 이 정도인데 실상 현실은 얼마나 더 비참하겠느냐는 역설의 날로 이루어진 양날의 검. 아마네의 서투른 안내를 따라 가는 바네 마을 가는 길은 흙먼지 날리며 농담 지껄일 만큼 낭만적인 길이 아니다. 질척거리는 길 위를 달리는, 난방이 전혀 되지 않는 화물차의 뒷칸에서도 노래는 흘러 나오지만 아이들이 부르는 노래의 가사는 이런 내용이다. “인생이라는 놈은 나를 산과 계곡으로 떠돌게 하고 나이 들게 하면서 저승으로 이끄네....". 아이들의 동심마저 잡아 먹은 가혹한 현실, 현실을 숙명으로 여기는 가련한 민족. 이 노래를 들으며 아마네는 마디에게 뽀뽀를 한다. 이건 단지 아이스러움의 표현일 뿐이다. 언제 죽을지 모르는 불치병 환자에 대한 연민이나 거창한 휴머니티가 아니라 그들 민족의 풍습대로 가족이기 때문에 가족끼리의 애정을 뽀뽀로 표현하는 것 뿐이다.

    아마네에게 마디는 소중한 가족이지만 마디의 병에 대해서는 고민하지 않는다. 고민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개념이 없다. 다만 마디가 아파하는 것이 안타까워서 마디를 데리고 눈덮인 묘지로 가서 대답없는 신에게 소박하게 기도하는 정도가 아마네의 판단력이다. 마디의 병을 진지하게 고민하는 아윱이 자기를 나무라는 것이 섭섭할 따름이고, 또래의 아이들과 동등한 조건 속에서 살고 싶은 것이 아마네의 소원이다. 아마네가 바라는 동등한 조건 속의 삶이라는 것은 노트를 다 쓰고 나면 새 노트를 가지고 싶은 정도다. 그 마을의 누구도 그 이상의 조건 속에서 살지 못하기 때문에 아마네의 요구도 여기 까지다. 마디의 수술을 위해 지뢰밭 천지의 국경을 향해 출발하는 아윱에게 새 노트를 사다 달라는 아마네를 통해 감독은 슬며시 쿠르드 족 전체가 직면한 과제는 실수로 가져와 버린 친구의 노트가 아니라 민족 자체의 생존이고, 우리의 고민은 막연한 미래가 아니라 지뢰밭과 도적떼가 버티고 있는 가혹한 현실이라는 감정 섞인 항의를 내뱉는다. 아윱이 국경 근처 산 등성에서 겪어야 하는 사면초가의 상황은 쿠르드 민족이 처한 암울한 현실의 집대성 같다. 공권력의 보호를 요청할 수도 없는 불법적인 생업 수단, 혹독한 추위를 견디라고 먹인 술에 취해 드러 누운 노새, 노새의 짐을 노리는 약탈자, 어디에 얼마 만큼이나 깔려 있는지도 모르는 지뢰. 술에 취한 노새를 일으켜 세우기 위해 내뱉는 아윱의 절규보다 더 고통스러운 것은 지금 현재 마디에게 엄습한 혹독한 추위다. 마디에게는 수시로 찾아드는 병마의 고통에서 벗어나는 것보다 지금 당장 뼈 속까지 저려 오는 추위로부터 탈출하는 것이 더 간절하다. 간신히 노새를 일으켜 세워서 야트막한 국경을 넘는 아윱과 마디를 보면서도 섣불리 낙관이나 희망 같은 단어를 떠 올릴 수 없는 것은 그들 민족의 과거와 현재처럼 미래도 긍정적인 것과는 거리가 멀게 느껴지기 때문이다. 오르막이 가파랐던 것 만큼 내리막도 가파를 것이고, 가파른 내리막길에는 오르막길 만큼의 눈이 쌓여 있을 것이다. 앞으로 걸어가야 할 길에도 지뢰는 널려 있을 것이고, 약탈자는 어디선가 눈을 부릅뜨고 그들의 재산과 생명을 노릴 것이다. 멀지 않은 곳에서 이미 늑대가 입맛을 다시고 있지 않는가.

    명망있는 평론가들이 이 영화를 비토리오 데 시카의 <자전거 도둑>과 비교했다지만 그 비교는 왠지 어색하다. 이 영화가 태도의 면에서 전후 이태리의 네오리얼리즘 영화들이 취한 비관적 현실 검증과 맞닿아 있기는 하지만 절박함의 정도는 몇 곱절 상회하기 때문이다. 또한 이 영화에서 노새는 <자전거 도둑>의 자전거처럼 생계와 직접적으로 연관되어 있기는 하지만 노새의 진정한 의미는 생계 수단이 아니라 형제의 목숨을 구할 마지막 희망이기 때문이다. 그보다 더 가혹한 현실은 노새가 후한 가격에 팔려서 수술을 받는다고 해도 마디는 다시 7, 8개월의 시한부 인생을 살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면 그때는 마디의 두번째 수술비를 위해 아마네를 시집보내야 할까? 그들이 의지할 것이라고는 가족 밖에 없는데, 살을 에일듯한 눈밭에서도 마디에게 약 먹이는 것을 잊지 않았고 아무리 힘들어도 아마네의 새 노트 사는 것을 빠뜨리지 않았던 아윱은 어떤 결정을 내릴까? 이 영화는 에밀 쿠스타리차의 <집시의 시간>처럼 소수 떠돌이 민족의 삶을 다룬 영화지만 초현실주의적 운명론과는 깨알 만큼의 연관도 없고, 키아로스타미의 <바람이 우리를 데려다 주리라>와 동일한 민족, 유사한 공간을 배경으로 삼았지만 시를 읊조릴 만큼 낙관적이지 않다. 미라 네어가 연출한 <살람 봄베이>의 인도보다 몇 곱절 절망적이고, <자전거 도둑>의 비내리는 회색 거리보다 무겁고 냉엄한 것이 쿠르드 족 자치구의 현실이기 때문이다. 이 영화의 마지막 장면은 구소련 스촨 지방을 배경으로 했던 비탈리 카네프스키의 <얼지마, 죽지마, 부활할거야>의 마지막 장면을 뒤집어 놓은 것처럼 보인다. 영화 밖으로 걸어 나오는 아윱과 영화 속으로 걸어 들어 오는 감독, 그들을 동시에 둘러 싸고 있는 생생한 현실. 아이의 시선을 빌려 가공한 현실이 이토록 육중하고 냉혹하다면 그들이 실제 겪고 있는 현실은 또 얼마나 지독할까!

2005. 02. 16. 山ZIGI VINAPP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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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한 말들을 위한 시간(2000, A Time for Drunken Horses / Zamani baraye masti asbh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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