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목 : 곰이 되고 싶어요
장 르 : 애니매이션
감 독 : 야니크 하스트롭
극 장 : 허리우드 극장 RED관.
관람일: 2003년 1월 16일 금요일.
이 영화는 벤트 할러(Bent Kaller)의 동화를 각색한 작품이다. 사실 보면서 '스토리가 뭐 이래?' 라고 생각하였는데, 그게 꼭 그렇진 않은 모양이다.
그 스토리란, 북극에 엄마곰과 아빠곰이 살고 있었다. 그런데 엄마곰은 늑대의 습격으로 그만 죽은애기곰을 낳고 만다. 너무나 슬퍼하는 엄마곰을 위해 아빠곰은 인간의 아이(이누이트인)를 데리고 온다. 엄마곰은 그 인간의 아이를 키우게 돼고 그 아이는 자신이 곰인줄 안다.
한편 이누이트인 아빠는 그 아이를 필사적으로 찾아 다닌다. 그리고 자신의 아이를 키워준 그 엄마곰을 죽이게 된다. 하지만 아이는 인간의 세계에 적응하지 못하게 된다. 그리하여 엄마곰이 죽을 때 일러주었던 '산신' 을 찾아가게 되고 거기서 진짜 곰이 되기 위한 방법을 알게 된다. 그리하여 여러 관문을 넘고, 마침내는 이누이트인 아빠와 엄마의 인정하에 곰이 되어 살아간다는 이야기이다.
인간이 곰이 되어 살아간다는 이야기에 긍정적으로 생각을 해야할지, 말아야할지에 대해 고민도 잠깐 했었고 이러한 이야기를 아이들이 들었을 때에 너도나도 다 곰이 된다고 하면 어쩐다지? 라는 황당한 생각도 들었었다. 그리고 그에 대한 점은 아직도 잘 모르겠다.
다만 지금 내가 알 수 있는 건, 너무 심각히 생각하지만 않는다면 이 영화를 통해서 모든 동물들의 '모성애' 와 '부성애' 에 대해서 느낄 수가 있다는 것이다. 난 엄마곰과 이누이트인 엄마가 슬퍼할 때마다 함께 울면서 영화를 봤으니 말이다.
정말이지 누구 편을 들며 울어야 할 지 알수가 없었다. 이 동화에 '편가르기' 란 없는 모양이다. 그냥 다들 처지가 불쌍하고 가슴아팠다. 아이를 잃은 것은 그 누구의 잘못도 아니다. 아이의 잃음은 사람이건 짐승이건 간에 모든 '어미' 의 가슴을 찢어놓는 일인 것이다.
참고로 이 애니매이션은 <키리쿠와 마녀>, <프린스 앤 프린세스>를 제작한 Les Armateurs社에서 제작하였다. 그런만큼 그 아름다운 색채의 조화는 말로 표현 할 수가 없다. 은은한 오로라의 빛과 차디찬 북극 바다에 비춰지는 빙하의 모습등은 정말 감탄을 절로 자아내게 한다.
또한 동양의 멋을 살렸다는 글귀로 미루어 짐작해 보건데, 그 '동양의 미'를 영상에서는 우리의 수묵화와 같은 붓터치로 나타내지 않았나 싶다. 모든 그림에는 '線'이 존재했고, 그 '線'을 붓터치와 같은 기법으로 강, 약을 표현하여 그 매력을 한껏 살렸다. 특히나 그러한 '線'의 섬세함과 부드러움은 '이누이트인 집 실내의 포근함','북극곰' 그리고 '모성애'의 감성을 한껏 살렸다고 느껴진다.
또한 인상깊었던 장면으로는 '산신'이 나왔던 때이다. 보통 '산신' 이라고하면 무시무시하거나 웅장하게, 아니면 백발이 성성한 할아버지 정도로 생각할 것이다. 그러나 이 영화에선 그렇지 않다. 웅장하면서도 코믹한, 장엄하면서도 무섭지 않은, 그러한 '산신'이 등장한다. '어쩜 이렇게도 틀에 박혀 있는 사고밖에 하지 못할까?' 라며 내 자신을 탓하던 순간이었다.
이 영화의 음악 또한 빼놓을 수 없는 것 중의 하나이다. 정말 멋진 영화음악이니 꼭 들어보시길 권한다. 영상미와 더불어 정말 압권이다.
잠깐동안 북극 그린랜드의 전설 이야기를 듣고 난 기분이다.
P.S. 알래스카와 캐나다 북단에 살고 있는 몽골리안 계통의 민족을 우리는 일반적으로 '에스키모'라고 알고 있는데, 정확한 표현은 '이누이트'라는군요. 참고로 '에스키모' 란 고기를 날 것으로 먹는다 하여 서양인들이 폄하하여 붙인 말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위 내용에 '에스키모' 대신 '이누이트'란 용어를 사용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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