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술 평론가가 본 “애니메이션 원더풀데이즈” - 원더풀데이즈의 수려한 “이미지”로 스토리를 즐겨라.
by 이안 (미술평론가, SF(Soul of the Future)展 전시기획자)
테이블위에 “탐스러운 사과들”이 놓여있다. 이 사과라는 사물을 보고 사람들은 똑같이 반응하지 않는다. 만약 배고픈 자라면, 먹어치우고 싶은 생각이 먼저 들것이고, 상인이라면, 사과의 가격을 궁금해할 것이고, 농부는 사과의 질을 유심히 따져볼 것이다. 그리고 화가가 이를 본다면 그리고자 하는 미적 욕구를 느낄 것이다. 만약, 목수가 봤다면 사과보다는 테이블에 관심이 있을 것이다. 사과라는 본질은 하나인데 이 사물을 대하는 이의 심리적 반응은 감상자에 따라 다양하게 반응한다. 예로 사물을 언급했지만, 감상의 대상이 예술작품일 경우, 즉 미적 대상인 경우에는 감상자는 미적으로 바라보기위한 접근법 즉 미적으로 바라보려는 감상자의 태도 혹은 노력을 필요로 한다. 감상의 방해를 최소한 줄이기위해 대상과 감상자사이에 존재하는‘물리적 거리(physical distance)’를 넘어‘심적 거리(psychical distance)’를 유지해야한다. 이것은 일종의 미적 태도(aesthetic attitude)를 지적하는 것인데, 이는 미적 태도론의 한 지류인 20세기초반 등장한‘심적 거리’이론을 지칭하는 것으로 미학에서 다루어지는 이론이다. 이곳에서 미학(aesthetics)이론을 자세히 살펴볼 이유는 없겠으나, 이를 예로 든 것은 본 글의 두가지 접근법을 설명하기 위함에서이다. 첫째, 필자는 이미지를 감상하길 즐겨하고 업으로 삼고 있으며 동시에 개개인의 이미지표현능력에도 관심을 갖고 있는 미술평론가입장에서 <원더풀데이즈>를 바라본다는 점과, 둘째, 필자를 포함한 우리 모두는 과연 <원더풀데이즈(이하 <원데>로 표기)>에 대한 감상자(전문가이든, 일반인이든 통틀어서 영화관람객, 애니메이션관람객, 원더풀데이즈라는 한국애니메이션관람객)로서의 태도, 즉 극장 애니메이션의 불모지인 이땅에서 한국의 애니메이션 <원더풀데이즈>라는 대상을 감상할 준비가 돼있는가에 관한 확장된 물음을 제시하기 위한 전거이다. 최근 국내 애니메이션계에는 <원더풀데이즈, 7월 17개봉>로 떠들썩하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영화계에서 더욱 떠들썩하다. 말그대로 소문난 잔치가 되었다. 얼마전(2002.7.1) 기자시사회이후 더욱 소문난 잔치가 되었다. 많은 평들의 홍수세례는 세인의 관심을 더욱 주목시키고 있다. 대학시절 일본애니메이션 천공의 성 라퓨타를 보고 애니메이션이라는 새로운 이미지영역에 반해 연구대상으로 삼아 빠져든 필자에게는 한국 애니메이션에 쏠린 이 모든 것이 그간 국내 애니계에서 볼수 없었던 신풍경이기도 하거니와 종국에는 애니메이션에 대한 사랑에서 비롯되었다는 점에서, 한국 애니도 발전하고 있다는 희망으로 반가움이 앞선다. 일본대중문화 개방발표시점인 1997년으로 기억된다. 한국애니메이션에 일반인의 관심이 모아지기 시작한 것이, 더불어 문화콘텐츠에 대한 지대한 관심이 이어졌고 최근에는 국내의 현대미술분야에서도 관심을 갖고 있다. 이미 수년전부터 세계미술계를 주도하는 미국을 비롯, 유럽에서 애니메이션(특히 아니메)관련작품들을 전시기획하는 사례들은 유행처럼 번지고 있다. 세계 미술계의 이러한 경향은 애니메이션이라는 대중문화의 이미지(주로 캐릭터)에 주목한 것이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한국애니에 대한 관심은 영화계에서 먼저 적극적으로 시작되었다. 참으로 재미있는 일중의 하나는 그러나 한국 애니메이션계의 현실을 알려주는 척도이기에 재밌게 볼수만은 없는, 취미로 출발했다고 보기엔 너무도 전문적인(애니메이션정보적 측면에서) 애니메이션전문가들이 등장하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만화분야도 마찬가지다. 대표적으로, 100여개에 이르는 애니메이션만화관련학과의 탄생, 그리고 더욱 놀라는 것은 이 많은 학생들을 가르치는 애니메이션, 만화전문교수들의 등장이다. 언제 이 많은 교수들이, 전문가들이 양성되었단 말인가? 애니메이션의 경우만 보아도, 대학에서 실기교수에 해당하는 실제 창작에 참여한 제작전문가들이 대학으로 이동한 것은 더욱 아닌데 말이다. 이러한 현실은 미술대학을 졸업하고 실직자가 대부분인 미술계의 과거사를 답습할 것으로 보이기에 경제적, 사회적, 문화적 손실을 가져올 것이 분명하기에 안타까울 따름이다. 한국땅에서 애니메이션에 대한 세인의 관심의 시작을 97년으로 본다면, 이후 6년이라는 세월동안 한국 극장가에 걸린‘기억될만한(논의의 대상이 될만한)’대표적 장편애니메이션은 마리이야기와 오세암 두 점뿐으로 기억된다. 백년의 역사를 지닌 서구의 애니메이션사가 말해주듯 수많은 창작된 작품수가 그 역사를 반증하듯이, 작품의 창작이 우선시되어야 하는 것은 기본이다. 그래야 제대로 된 평가도 나올 수 있는 것이다. 일단 다양성은 배제하더라도 수적으로 열세에 있는 이 열악한 극장용 장편 작품수와는 대조적으로, 한국의 애니계는 어느새 창작의 일선에서 작품제작에 힘쓰는 현장전문가들보다는, 이들을 평가하고 판단하려는 전문가들의 목소리가 더 높은 세상이 된 듯 보인다. 작품수보다 전문가들의 수가 앞지르다보니 마치 한국의 애니메이션이 오랜세월 전문적으로 평가되온 듯한 착각마저 드는 듯하다. 이는 미술의 경우 비평가들이 작품수나 작가들의 수를 미처 따라가지 못하는 현실과는 정반대의 상황을 보여준다. 제작된 작품수의 열세뿐만 아니라, 타쟝르(미술, 문학, 영화)와 비교해보아도 제작된 작품들을 체계적으로 분석하고 평가한 예가 거의 전무한 것이 한국 애니계의 작금의 현실이다. 예로, 앙시대상을 수상한 마리이야기나 오세암의 경우, 개봉이전 전문가들의 입에서 평가(폄하든 칭찬이든)의 양상은 다양하지 못했다. 예술성을 인정받는 앙시에서 대상을 수상한 마리이야기에 대한 분석(스토리,이미지)은 전문적이지도 않았고, 그 관심은 <원데>만 못햇던 것이 사실이다. 그런데 유독 <원데> 에는 많은 전문가들이 개봉이전부터 다양한 평을 달고 있어 주목되는 것이다. 그 관심이 애니메이션 선진국과는 비교도 안되는 엄청난 제작비때문에 시작된 것이라면, 한국 애니계의 미래는 창작자나 제작자들보다 이를 판단하려는 전문가들때문에라도 그들이 비교하는 선진국수준에 이르기에 오랜 세월을 소비해야하는 건 아닐까라는 우려를 해본다.
<원데>에 대한 평을 쓴 이들의 직함은 실로 다양해서, 신문 잡지사 영화전문기자, 만화평론가, 애니메이션평론가, 영화평론가, 만화애니메이션 관련 대학교수, 만화애니메이션 온라인사이트운영자등 다양하다고 볼 수 있다. 우선, 이같은 전문가의 다양함이 이들이 평가해야할 창작작품의 수를 훨씬 넘어선다는 점은 아이러니하다. 굳이 언급하지 않아도, 수십년간 애니메이션산업을 키워온 일본의 경우, 애니메이션을 평가하는 이들보다 작품수가 훨씬 많다는 점은 원론적이지만 한국현실에는 시사적이다. 첨언하자면, 국내의 100여개에 이른다는 대학이라는 교육기관이, 일본의 경우 애니메이션전문학과는 작년에 신설된 단 한개에 불과하고 만화전문학과도 두 세개에 불과하다는 점, 미국의 경우도, 그 유명한 애니메이션생산지 LA지역에 애니메이션관련학과는 3개에 불과하다는 점, 교육 또한 실제 창작자들(애니메이터,감독등)이 맡는 것이 일반적이라는 점은 노하우부족중 하나로 지적되온 인력 부족을 겪고 있는 애니현장에 이들 인력이 공급되지도 못하고 공급되더라도 재교육을 시켜야만 하는 악순환을 겪고 있는 참된 교육의 부재, 한국 애니계의 현실과 거품현상을 지적하기에 적절한 예로 보인다. 우선, 전례없이 많은 수의 전문가들이 관심을 드러낸다는 점만으로도, 분명 <원데>는 특별하다. 전문가들이 많은 분석, 평을 달지 않은 마리이야기와 다르고 오세암과 다르다. 특별한 무언가가 있다. 필자는 그 특별한 무언가를 스토리에 집중해 평한 대다수의 전문가들의 입장과는 다른 각도에서, 즉 미술적 시각으로 <원더풀데이즈>를 평하고자 한다.
< 애니메이션과 실사영화의 크나큰 형식적 차이 - 이미지, 그림 > 먼저 원론적 얘기부터 하자. 애니메이션은 영화인가? 실사영화(live action fim)의 범주에 들어가는가? 실사영화의 잣대(평가방식)를 적용하는 것이 정당한 것인가? 아마도 그 속성(animated film)이 그렇듯 영화라고 답하는 이들이 많을 것이다. 그리고 애니메이션역사속에도 기록돼있듯이, 형식적으로 맞는 말이다. 그러나 애니메이션은 스토리를 강조하는 실사영화범주(영화등장초기에는 언어적 측면보다는 이미지가 강조되었다.)와 다른 형식(구조)이 엄연히 존재한다. 그것은 화면을 구성하는 이미지다. 셀애니를 기준으로 삼고 여전히 유효한 관점에서,‘그림’이라는 형식적 차이점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오늘날 다양한 재료, 기법이 사용되긴 하나 포괄적 의미의‘그림’이라는 2차적원인 방식이 애니메이션을 구성한다.
미니어처든, 3D든, 2D든, 종이, 인형, 점토의 방식이든간에 애니메이션은 영화처럼 실제 인물이 등장하지 않는다(간혹 예외도 있다). 또한 이 이미지(그림)는 ‘움직임(movement)’이라는 운동성을 부여받는다. 정확히말하면 움직임은 애니메이터가 부여한다. 이 움직이는 이미지를 표현한 애니메이션은 실제인물이 아닌 이미지(그림)가 스토리를 주도해가는 방식을 취하게 된다. 즉 그림이 스토리를 리드해가고 대변하는 도상적 상징성을 원초적으로 내포하고 있는 장르인 것이다. 이같은 이미지를 강조하는 애니메이션의 특징은 간과하고 지날 수 없는 실사영화와는 다른 형식적 차이점이다. 그리고 이는 곧, 결과적으로 영화적 평가방식, 분석방식을 애니메이션에 모두 적용시킬수 없다는 말이 된다. 애니메이션은, 다양한 방식의‘그림’으로 이루어진 애니메이션영화(animated film)이다.‘영화’와 ‘미술’이라는 두 속성을 지닌 장르인 것이다.‘그림을 움직이게 만든 영화’. ‘정지된 그림이 움직인다는 것’. 영화와 미술의 결합이 바로 애니메이션쟝르이다.
이 ‘그림’, ‘움직이는 그림’. 애니메이션의 미술적 형식을 규정하는 것은 사실상 미술사와 영화사속에서 동시에 발견된다. 애니메이션을 미술적 시각으로 바라본 것은, 애니메이션역사만큼의 깊이를 지닌다. 현대미술논의에 빠질수 없는 아방가르디스트들이 활동하던 1910-30년대, 당대 신기술인 사진의 등장으로 미술계는 위기의식을 느끼고 있었고 많은 미술가들(회화작가) 특히 한스 리히터, 페르낭 레제, 뒤샹, 만레이등은 애니메이션에서 예술적 돌파구를 찾고자 했다. 이들은 새로운 회화의 실험도구로 ‘움직임(movement)’을 강조하는 ‘애니메이션’이라는 쟝르에서 회화의 돌파구를 찾았고 이는 관심과 호기심의 대상이기에 충분했다. 1910년대 후반 독일예술가들을 중심으로 ‘영화는 회화와 같은 시각예술이기에 영화의 가장 순수한 형식은 추상일 것’이라는 분위기가 쇄도했고 미술가 한스 리히터, 바이킹 에겔링같은 작가들은 애니메이션영화를 제작했다. 다다출신의 표현주의 화가였던 발터 루트만은 ‘움직이는 회화(애니메이션)’에 관심을 갖고, 셀대신 유리위에 그림을 그리고 씻어낸뒤 다시 그리기를 반복하여 찍어낸 방법을 사용하여 총 5편의 애니메이션영화를 제작했다. 현대미술탄생의 중추적 역할을 한 뒤샹 또한 1926년 모터로 움직이는 회전하는 원판을 이용한 단순한 형태의 추상애니메이션을 만들기도 했다. 이는 미술계에서 일어난 애니메이션에 대한 미술적 관심이었다. 또한 이시기는 영화라는 영역에서조차도 예술영화의 경지를 모색하고 발전시키기위해, 1908년 회화와 연극에서 등장한 표현주의기법을 답습한 독일 표현주의영화가 세팅, 의상, 인물표현방식에서 영화에 대한 미술적 접근을 차용한 역사적 시기이기도 하다. 이처럼 미술사뿐 아니라 영화사에서 애니메이션을 회화적, 미술적 접근으로 바라본 시각은 존재해왔다. 그렇다고 이러한 미술적 접근은 단지 지난 역사속에서나 발견되는 것은 아니다. 앞서 잠시 언급한바 있지만, 최근 세계의 현대미술계나 국내 미술계는 애니메이션을 전시작품으로 전시하는 새로운 트랜드를 만들고 있다. 1999년이후 현재까지 <애니메이션 Animations,PS1,(1999)>, <애니메이션 Animations;Pierre Huyghe and Philippe Parenno,PS1.Queens,(2001-2002)>,<나의현실;현대미술과일본애니메이션문화전(2001-2004)>, <슈퍼플랫Super Flat, LAMOCA, (2000-2001)>, <무라카미 타카시:Made in Japan, 보스턴미술관,2001>, <껍데기에 불과한No Ghost just a Shell, 샌프란시스코미술관(2003)>, <만화시대의 미술 Art in the Toon Age, 미시건대학 미술관(2003)>, <애니메이션 Animation, 베를린미술관(2003)>등 다양한 전시들이 줄을 잇고 있다. 제목에서 알수있듯이, 이들은 애니메이션을 소재로 한 전시제목들이다. 재미있는 점은 이러한 전시를 주도한 중심에 일본 애니메이션(아니메, anime)이 자리한다는 점이다. 이미 80년대부터 미국내 대중과 영화인들에게 인기를 누려온 아니메가 최근 미술계로 진입하여 유명전시장들을 점령한다는 사실은 일본애니메이션을 모범으로 삼는 국내 애니계에는 부러운 현실이다. 지금은 세계적인 미술가가 되었으며 세계미술계에 일본의 아니메문화를 알리며 돌풍을 일으킨 젊은작가 무라카미 타카시는 한때 애니메이터가 되려는 꿈을 꾸기도 했고 올여름에는 루이비통의 디자이너로 영입되어 여름신상품디자인에 자신의 컬러풀한 이미지들을 삽입하여 인기를 받고 있다. 그의 작품들은 전세게에서 인기를 얻고 있고 유명 컬렉터들중 그의 작품을 소장하지 않은 이가 없을 정도다. 이러한 경향의 국내 출신작가로는 세계 유명작가대열에 합류한 이불이라는 여성작가로, 그녀는 97년이후 일본 애니메이션에 등장하는 여성사이보그이미지를 차용하며 국내보다는 해외에서 세계순회전시로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다. 국내 미술관들도 애니메이션을 전시상영하는 기획전들을 기획하는 추세이다. 현재 일본 도쿄현대미술관에서는 현대미술관으로서는 최초로 미야쟈키 하야오의 작품들을 전시히는 기획전을 열고 있다.(우리 애니계도 미술관에 입성하여 애니메이션을 선보이는 미래가 오길 바란다.) 과거 애니메이션사나 영화사를 통해서도 알수있듯이, 드리고 작금의 미술계의 애니메이션문화에 대한 적극적 관심은 바로 애니메이션이라는 장르를 영화가 아닌 미술로서, 이미지의 중요함을 인정한 시사적 사례이기에 주목할만하다.
이런 논점에서 볼때, 애니메이션 <원더풀데이즈>는‘그림(2D,3D,미니어쳐)’으로 이루어진, 이미지가 강조된 애니메이션영화(animated film)이다. 이 작품의 미술적 특징은 크게 두 부분으로, 즉 캐릭터는 전통적인 셀 애니메이션방식으로,그리고 배경은 3D 와 미니어쳐로 구성돼있다. 대부분 비주얼이 뛰어나다고 평한다. 그렇다 빼어나다. 먼저, 캐릭터의 경우, 우선 캐릭터를 그린다는 행위는 어려운 일이다. 어렵다라고 말하는 것은 특히 선과 형태로 인물을 레이아웃하는 방식이 묘사력을 요하는 즉 캐릭터디자이너의 자질을 요구한다는 점에서 그렇다. 늘상 노하우, 실력부족을 논하던 한국 애니계는 이 탤런트를 지닌 인물들이 부족을 넘어 기근현상을 보여왔다. 그렇기에 작품의 질이 향상되지 않는 이유의 하나로 작용해왔다. 현재의 캐릭터는 심미적으로 보기에 어색함이 전혀 없다. 수하, 제이, 시몬 모두 예쁘고 잘 다듬어진 인물로 변했고 준수하다. 둘째, 캐릭터의 연출력의 경우, 움직임의 유연성이나 간혹 거슬리기는 하지만 여러 애니메이터들의 손을 거치는 그렇기에 또 어려운, 화면마다 차이가 나는 캐릭터의 외형적 모습(특히 얼굴형태, 명암, 움직임)의 정리정돈은 원데가 원화작업에 본격적으로 착수한 2년내에 얼마 안되는 인원이 그린 작업치고, 기근현상속에서 검증되지 않은 작업자들이 처음으로 작업한 것치고, 그리고 한국 극장애니메이션중에 이러한 퀄리티를 본 선례가 없었기에 준수할 뿐이다. 배경의 경우, 미니어쳐는 너무도 정교하다. 메카닉을 표현한 3D의 경우, 오토바이의 형태가 실은 그리 비슷하지도 않지만, 아키라의 오토바이를 좀 닮으면 어떤가? 공각기동대는 블레이드러너를 닮았고, 메트릭스는 공각기동대를 닮았다. 이러한 모방은 비일비재하다. 미술은 더하다. 앞서 지적한 이불의 사이보그작품은 아니메의 사이보그를, 공각기동대의 쿠사나기의 찢겨진 신체를 모방했다. 우연이든 고의든, 모방성으로 치면 현대미술작가들은 선배작품의 표절자들이 대부분이다. 오토바이 한대를 놓고 벌이는 논쟁은 시간낭비로 보인다. 사실 매끄러운 3D의 배경은 그간 인물표현에 있어 논할수도 없는 낮은 질적수준을 보여왔던 한국 애니메이션의 퀄리티를 훨씬 능가함에도 불구하고, 그 진가를 받지 못하는 느낌이 드는 것이 사실이지만 그만큼 이 세가지 방식을 합성함에 있어서, 즉 그림을 만들어내기위한 산고의 과정으로 이해한다. 이 세가지 방식을 합성한 화면마다의 각 이미지, 그림은 환상적이기까지 하다. 전혀 이질감이 들지 않는 점은 미술로 말하면 그림을 잘 그렸기에 나오는 결과물이다. 각각의 이미지들은 스틸컷으로 감상하면 더욱 섬세하기 그지없다. 스태인드글라스앞의 제이의 눈에 반사된 스태인드글라스의 투영장면의 포착은 세심한 주의를 느끼게 해 좋았다. 물론 연출력으로 템포를 줄이거나 당기었다면 그림의 생명력은 더 생기를 발했을 것이다. 그래서 그림의 문제는 아니라고 본다. 장면을 이렇게까지 꼼꼼하게 신경쓴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이미지를 강조한 <원데>는 미술적 시각으로 감상하기에 무리가 없는 작품인 것이다. 필자는 두 번이나 영화를 보았고 개봉하면 또 볼것이지만, 스토리의 경우, SF 장르만의 스토리는 누가 만들어도 전형적일 가능성이 크다. 미래사회가 배경이고 암울하고, 미래문명간의 싸움, 사이보그와 인간이 대립하는 등, 그 사이에 공존하는 권력관계는 늘상 존재하는 구도론이다. 환경문제, 오히려 사랑이라는 단순한 구조로 간 것은 또다른 내러티브를 느께게 해서 좋았다. 이미지를 감상하느라 바쁘기도 했지만, <원데>의 이미지의 힘은 강력했고, 이미지를 통해 스토리를 이해할수 있었다. 필자는 시선이 응시하는 곳으로 여행을 떠나 즐거움에 여념이 없었다.
<감각을 즐기자! 눈으로 즐기자!> 감상적 측면에서, 실제인물이 등장하는 실사영화는 영화에 대한 감정이입을 쉽게 일으킨다. 하지만, 애니메이션의 경우, 인물의 행동은 실사영화속 인물의 것과 많은 차이가 나기때문에 감정이입은 그만큼 어렵다. 우리의 눈이 인지할수 있는 친숙함의 정도가 떨어지기때문이다. 아마도 어른들이 애니메이션을 극장에서 관람하지 않는 이유도 감정이입이 쉽게 되지 않기때문일 것이다.(그래서 애니메이션의 대중적 파급효과가 적은 이유로 지적되는, 아이들이나 보는 문화쯤으로 생각하는지도 모른다.) 애니메이션 인물동작의 움직임은 실제인물 동작과 차이가 나므로 어떤 점에선 실재하지않는, 우리의 눈이 지각하지 못하는 허상의 움직임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 헐리우드의 경우 많은 제작비중 일부는 이처럼 부자연스러운 인물 동작이 실사영화처럼 자연스러워지고 우리들의 눈에 친숙해지는데 소요된다. 80년이상의 역사를 지닌 미국의 경우, 이제 그들에게 애니메이션은 자연스러운 친숙한 장르가 되었다. “생명, 영혼을 부여하여 움직임을 만드는”의미를 지닌 애니메이션의 어원은 너무도 멋지다. 움직이는 그림은 더욱 매혹적이다. 영화이면서 미술이면서 동시에 이 양자를 모두 떠나는 독특한 장르. 이것이 애니메이션이 지닌 매력이다. 애니메이션은 영화적 방식으로 설명할수 없는 부분이 있다. 우리는 영화를 보지만, 애니메이션의 그림을 통해 미술감상도 동시에 즐길수 있다. 이미지의 감상만으로도, 영화감상하는데는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다. 필자는 그 유명한 스타워즈를 보면서 스토리가 좋았다고 느낀적은 한번도 없고, 이미지의 스펙터클을 기대하고 즐기기에 바빴다. 첨단미래사회를 그린 마이너리티 리포트의 스토리가 좋다고 생각지도 않는다. 스토리는 기억나지않는다. SF 영화는 더더욱 이미지만이 남을 뿐이다. 필자에게 스토리와 이미지를 모두 충족시킨 최상의 영화는 공각기동대뿐이다. 개인적으로 이런류의 영화를 좋아하긴 하지만... <원데>의 스토리에 집중하는 대다수의 평들은 이미지(그림)를 자세히 분석하지 않는다. 비주얼이 뛰어나다. 스토리에 묻혔다는 등의 표현정도이다. 왜 뛰어난 것인지 등 그 프로세스를 제시하지 않는다. 만약 영화적 평가방식을 적용한다면, 이는 마치 실사영화의 그 미쟝센에는 전문적인 관심을 드러내지 않고 오로지 내러티브만을 강조하는 것과 같다. <원데>를 향한 평이 스토리로 집중할 수밖에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원데>라는 애니메이션과 실사영화라는 형식적 차이를 인지하지 않고 즉 미술적 방식 혹은 이미지, 혹은 그림에 대한 애니메이션의 독특성에 대한 전문성을 인지하지 못한 접근법이었다는 것이다. 미술평론가적 입장에서 볼때, 이미지(미술작품)의 분석은 가장 중심이 되는 도상적 분석을 넘어, 사회적, 문화적, 기술적 분석등 다양한 잣대를 드리댄다. 그것은 실사영화도 마찬가지이다. 그런 평이 객관적인 좋은 평이라는 데는 이의가 없을 것이다. 그런데 <원데>라는 영화와 미술의 결합이기도 한 애니메이션쟝르를 왜 영화라는 울타리안에만 가두어 놓으려 하는지, 내러티브만으로 평가하려 하는지 이해가 가지 않는 아쉬움이 자리한다. <원데>는 감각으로 즐기기에 충분한 애니메이션영화인데 말이다. 황량하기만 이 불모지에 <원데>라는 한국 애니메이션을 감상할수 있게 해주고, 앞서 지적햇듯이 필자를 포함해 그나마 전문가라는 이름으로 평이라도 하게 그 자리를 만들어준 고단한 노고에, 가늠할 수조차 없는 한국의 애니메이션 문화에 대한 대중적 인지도를 그나마 높이는데 일조한 스텦들에게 진정 박수를 보내고 싶지는 않는가. 여기는 한국이고 한국은 지금까지 이런 멋진 애니메이션을 만들어본 적이 없다. 그것만으로도 행복하지 않은가? 그 다음 걱정은 다음에 하자. 이미지를 즐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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